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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웹진 민연 퍼옴)
오승은
관련링크 : 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discourseList.minyeon?select… [1003]
증상과 해석

  알다시피 철학자(또는 인문학자라고 해도, 아니면 더 나아가 그냥 학자라고 해도 좋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마르크스를 증인으로 삼아볼 수 있다. 청년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 사상계, 특히 젊은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포이어바흐에 관해 11개의 짧은 단상으로 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남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마지막 11번째 테제는 다음과 같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것이다.”(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 n t e r p r et i e r t, es kömmt drauf an, sie zu v e r ä n d e r n) 따라서 마르크스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 세계를 변혁하려 하지 않은 철학자들을 고발하면서 철학의 지양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의 고발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그의 고발을 통해서도 철학자들의 일차적인 일은 세계에 대한,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실을 하나의 증상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증상이란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실이나 현상 또는 상태나 모양을 증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병의 표현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해보려고 하는 것은, 세월호라는 이름의 이 사건, 아직 적절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무명의 이 사건, 증상으로서의 이 사건에 대한 한 가지 단상이다. 이 사건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의 증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글은 앞으로 계속 새롭게 해석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이 사건에 대한 한 가지 문제제기를 시작해보려는 것이다.


 

  불운과 불의

 

  먼저 불운(不運)와 불의(不義)라는 두 개의 범주에서 시작해보자.

  정상적인 경우라면 세월호 사건은, 우리가 신문 사회면에서 흔하게 접하는 불운한 사고로 그쳤어야 하는 사건이다.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던 도중에 운이 나빠 또는 선원의 어떤 실수로 인해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선원들의 침착한 대처와 해경의 신속한 대응으로 승객들이 모두 무사히 구조되어 집으로 귀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어야 할 사고가 바로 이 사건이다. 가 사건은 그냥 운이 나빠 즐거운 수학여행 날 겪게 된 작은 사고였고 살아가면서 어쩌다 한 번씩 겪는 재수 없는 일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세월호 참사’라는 언론의 표현이 말해주듯이 끔찍한 참사, 비극적인 불의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단순한 배의 참사로 그칠 수도 있었음에도, 이번 사고는 수백 명의 생명, 그것도 아직 온전하게 자신의 재능과 인생을 펼쳐보지도 못한 수많은 고등학생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너무나 안타까운 참사로 변질되고 말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단순한 불운으로 그쳤어야 마땅할 이 사건을 불의의 참사로 만든 것일까?


 

  객관적인 것, 주체적인 것, 반인간적인 것-치안 기계로서의 국가

 

  세월호 참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세 부류의 존재들이다.

  우선 참사의 당사자인 세월호 운항사와 선원들이 존재한다. 만들어진지 수십 년이 된 낡은 배를 수입해서 제대로 안전관리 점검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무리하게 배의 설계를 변경하고과도한 선적을 마다하지 않은 해운사는 이 사고의 핵심적인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차례 보도되어 많은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던 것처럼, 승객의 안전과 생명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목숨만을 구하기 위해 속옷 차림으로 허겁지겁 제일 먼저 배를 빠져 나온 선장 및 선원들의 책임도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이들은 나중에 주검으로 발견된 요리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동료의 안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목숨만 도모했다는 점에서 어떠한 윤리적 비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두 번째 핵심 책임자는 바로 정부 기관이다.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듯이 정부는 낡고 오래된 배가 아무런 제재 없이 운항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배에 관한 안전 점검 및 관리에도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더욱이 사건 당시 승객과 선원이 배의 침몰 소식을 알렸음에도 여기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침몰하는 배에 다가와서도 승객 구출에 전력을 다하지 않은 해양경찰청은, 해운사 및 선원들과 더불어 이번 사건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해경만이 아니다. 정부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신속하게 사고를 수습할 수 있는 대책 본부를 구성하고 운영하지 못했고, 이처럼 끔찍한 사고를 접한 상황에서도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 및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당국자 및 여당 국회의원들은 이번 사고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간주하려는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이면서 국민들로부터 날카로운 비판과 불신감을 얻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류 언론 역시 이번 사고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승객 전원이 구조됐다는 무책임한 보도를 한 것도 언론이고, 사고 현장에서 제대로 사고 수습이 진행되지 않음에도 마치 일사천리로 활발한 사고 구조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허위보도를 함으로써 사고 가족들로부터 거센 항의와 불신을 자초한 것 역시 언론이었다. 더욱이 언론은 사건의 진실을 총체적으로 밝히려는 노력보다는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보도에 치중했을 뿐이다. 또한 이번 사건이 시기상으로 인접해 있던 6ㆍ4 지방선거에서 정부와 여당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건을 축소 보도하려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임으로써 KBS 총파업이 벌어지고 사장이 해임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이번 사고의 책임자를 열거하는 것만으로는 이번 사고의 원인과 성격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번 참사의 특징은 이번 사건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고가 아니라 무엇보다 주체적인 사건,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소주체적인 사건이며, 더욱이 반(反)인간적인 폭력을 수반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과소주체성(영어로 표현한다면 ‘under-subjectivity’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부연하겠다.

  이번 사고의 객관적 원인은, 세월호를 언젠가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던, 말하자면 간신히, 운 좋게 참사를 모면해온 배로 만든 해운사에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배가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운항하게 해준 관리 당국에게 있다. 배의 구조 및 운항에 대해 엄격한 규제와 철저한 관리 감독이 있었다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일어날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가능성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주체적인 요인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이번 사고는 단순히 배의 침몰 사고로 그치고 사람들은 큰 문제없이 배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말 그대로 단순한 불운으로 그쳤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참사를 단순히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불의의 참사로 만든 것은 바로 주체적인 원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사건을 주체적인 사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 주체적 요인들은 선원들과 해경을 비롯한 정부 당국이었다. 선원들은 승무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제일 먼저 배를 탈출함으로써 단순한 직업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적인 윤리를 저버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울러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일반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많은 인명의 피해를 낳을 수 있는 대형 선박 사고 같은 커다란 사건에 직면했을 때 마땅히 발휘해야 할 위기 관리 능력을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정부에게 돌아가야 할 책임의 몫은 엄중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반인간적 폭력라고 할 만한 일들이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세월호 사건 초기부터 정부의 공직자나 정치인들은 세월호 사건을 단순한 교통 사고 중 하나로 지칭함으로써 피해자 가족 및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세월호와 관련된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 폭언을 가함으로써, 정부와 여당이 이번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폭력은 아마도 세월호 가족에 대한 사복 경찰의 사찰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찰 행위 그 자체가 이번 사건의 중요한 증상을 이룬다. 팽목항에서부터 경찰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면밀한 사찰 행위를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가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고 많은 비난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사찰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어떤 종류의 사건이든 간에 그것이 국가의 치안에 동요를 불러올 수 있는 사건이라면, 국가는 항상 감시와 사찰을 벌인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적어도 한국이라는 국가는 일종의 치안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유일한 관심사는, 치안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공백을 초래하는 사건ㆍ사고를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처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건에 대한 분석과 평가 및 처리는 오직 치안 질서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만 이루어질 뿐, 국민 개개인의 생명의 존엄함의 보호나 민주주의적 가치의 보존과 증진이라는 관심은 전혀 부재하거나 아니면 치안 기계의 성격을 은폐하는 단순한 수사법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처럼 국가를 치안기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세월호에 관한 정부와 여당의 무관심이나 가급적 하루빨리 세월호에 관한 국민의 관심을 덮고 다른 문제로 전위시키려는 수구 언론의 노력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난 국가의 반인간적 폭력의 중심에는 바로 치안 기계로서의 국가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이처럼 치안 기계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일까? 국가는 처음부터, 원래 그런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고대의 어느 시기에 생겨난 국가는, 그 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가 지나서도 여전히 치안 기계라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처럼 거대한 질문에 대해 이 글에서 제대로 답변하기 어렵다는 점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국가의 초역사적인 본질이 어떤 것인지 묻는 것 자체가 이론적으로 부적절한 문제화(problematization) 방식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거창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간략하게 처음 질문에 대답해 본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치안 기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그것이 드러내는 치안 기계의 본성만큼 계급적인 성격을 띤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계급적인 국가라는 명제는 조금 부연이 필요한 주장이다. 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듯이,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위원회라는 것, 곧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역시 철저하게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고 관철하기 위한 도구이자 기계라는 것과는 약간 다른 주장이다. 실로 자본주의에서 국가들은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고 관철하기 위해 애쓴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날마다 스스로 검증하는 명제다.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 하에서든,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름 하에서든 정부는 늘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는 자명한 주장인 그만큼 우리에게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별로 말해주는 바가 없다. 곧 왜 다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이면서 국가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지 설명해주지 못하며, 계급적인 국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사회주의 혁명의 한 길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으로도 별로 말해주는 바가 없다. 더욱이 사회주의 70년 역사의 공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가가 치안 기계라는 성격을 띠는 것과 그것이 계급적 성격을 띠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국가의 반인간적 폭력이 생겨난다고 우리가 가설 삼아 주장한다면, 이는 오히려 국가가 기본적으로 주체적인 것(아마도 영어로는 ‘the subjective Th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이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주체성이 줄어들고 심지어 소멸할 지경에 이르게 될 때, 국가는 그 객체적 사물성만이 남게 되며, 그때 국가는 적나라한 도구적 성격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강한 이들, 권력과 부를 소유한 이들이 손쉽게 활용하고 오용하고 남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며, 자신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동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폭력 기계가 된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것,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주체성이 부재한다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일종의 검은 구멍이라는 것이 아닐까?

 


  검은 구멍

 

  돌이켜보면 그동안 우리는 늘 국가를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민등록증을 주고 병역 의무를 주고 세금을 걷어가고 복지를 실시하고 선거의 기회를 주는 어떤 것으로 여겨 왔다. 그리고 범죄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우리 대부분은 다행스럽게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외부의 적들의 침입에 맞서 때로는 전쟁까지 불사하는 것이 국가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또한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우리가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우리 앞에, 우리 이전에 주어져 있는 것으로 존재해 왔고, 또 그렇게 간주해 왔다. 그것은 단단한, 아마도 가장 단단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던 국가가 사실은 너무나 허망한 어떤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늘 그것이 우리 곁에 있다고, 우리의 편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지만, 사실 그것은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이었다.

국가가 검은 구멍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첫째는 국가의 놀라운 무능력이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국가는 전능한 존재로 군림한다. 국가는 막강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국민이 지닌 기본적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고 병역을 부과할 수 있고 세금을 걷어갈 수도 있다. 또한 개인이나 집단이 감히 꿈꾸기 어려운 거대한 사업을 벌이고 국민 개개인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적어도 대부분의 국민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사태는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 뚜렷하게 드러내 주었다.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무역 대국이라고 늘 자신을 홍보하지만, 현실은 한 사람의 국민의 생명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는 무능한 국가가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였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은 전능한 것으로 믿었던 국가가 사실은 지극히 무능력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국가가 검은 구멍이라면, 이는 국가가 우리 편이, 나의 편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 사건에서 대중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처럼 국가가 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고 사고 수습 및 사후 처리에서도 무능력을 보이는 것이 단순한 무능력이 아니라 무의지의 표현라는 점. 곧 국가는 단지 구조할 능력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구조할 생각나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가 사건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치안 기계로서의 국가가 가장 큰 관심과 공력을 기울이는 것은 더 이상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부나 여당이 이 사건의 위상이나 의의를 될 수 있는 한 축소하려 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경찰이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세월호 관련 특별법 제정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나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가 사건이 대충 무마되고 마무리되어 그냥 빨리 잊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질서와 치안이 유지되면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대중적 분노를 일으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아무런 책임 의식도 능력도 없는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부분이 고등학생들이었던 승객들의 순진함을 이용한 명령이었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 분노이고 안타까움이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리키는 환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학생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저항적으로 나섰다면, 그들이 조금 더 말을 잘 듣지 않는, 명령에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지 않는 아이들이었다면, 그들이 한 명이라도 더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심정은, 사실은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들 자신의 정치적 존재론의 위상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그 분노의 원천이었을 터이다. 과연 세월호 승객들이 안산의 단원고 학생들이 아니라 외국어고 학생들이나 강남의 명문고 학생들이었다면, 정부 당국이 세월호 구조에 이처럼 태만하고 무책임했을까 하고 대중들이 반문(反問)하면서 절감하고 또 두려워한 것은 국가는 그들의 편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검은 구멍으로서의 국가가 두 번째로 뜻하는 것이다.

 


    세월호가 호명하는 것

 

  하지만 검은 구멍이고 커다란 공백으로서의 국가가 가장 깊은 외상(外傷, trauma)으로 체험되는 지점은, 그러한 구멍과 공백을 메울 수 없으리라는 점, 그것은 사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늘 구멍과 공백으로 존재해온 어떤 것이며,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는 존재론적 사실로서 스스로 체험하고 납득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경우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관심과 망각이다. 또는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된다면(아마도 『니체와 철학』의 들뢰즈라면 “적극적 반동”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구멍과 공백을 메우려고 할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전능한 자의 무기력 증후군”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보호 받는 개인들은 이러한 보호가 그들에게 보장된 것인지, 그리고 보호에 대한 대가로 그들의 삶의 양식 및 일상적 실존이 통제되는 것은 아닌지, 또 이러한 보호가 자의적으로 철회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해서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전에 대한 감정은, 이들이 집합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또는 자신들에 대한 보호 양상들 및 통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개입한다는 느낌을 덜 가질수록 더 강력해진다. 아마도 가장 역설적인 것은, 보호자로서의 국가가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다는 것, 또는 우리를 보호하는 국가의 힘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부터 이러한 감정이 더 강력해진다는 점일 것이다. 외관상 우리에 대해서는 전능한―왜냐하면 우리는 국가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국가 자신이 실제로는 무기력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낳는 불안감은 때로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144~45쪽(강조는 발리바르).

  이런 상황에서 대개의 개인들은 자신들이 희생자 또는 불쌍한 사람들의 편에 있지 않기를 바란다. 국가가 그들의 편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내가,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내가 그들에 속하는 길이다. 실제로, 곧 경제적으로ㆍ물질적으로 그들에 속할 수 없다면, 상상적인 방식으로라도 그들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에서 공백에 대한 집합적 불안은 파멸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파시즘에 근접해 가고 있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 ⎯ 나는 “열등 인간”라는 말까지 쓰려 했었다 ⎯ 는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곧 국가는 누구 편인가?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 같은 책, 145~46쪽(강조는 발리바르).

  그렇다면 사실 과소 주체성은 대중들 스스로, 국민들 스스로 만들어내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국가에서 주체성이 부재할 때 드러나는 공백, 그 검은 구멍을 상상적으로 봉합하는 한 가지 방식인 셈이다.

  내가 앞에서 국가를 기본적으로 주체적인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특히 근대적인 정치체로서의 국민국가의 성격이었다. 짧게 말한다면, 근대 국민국가의 특징은, 이전의 국가들과 달리 더 이상 초월적(신성(神聖)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혈통과 같은)에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정체로서의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르케 없는(an-arkhe) 것이다. 아르케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아르케는 만물의 시원이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둘째, 이러한 시원이나 근원은 또한 원리나 토대, 근거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마지막으로 아르케는 지배나 통치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에는 지배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원리 또는 토대가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이를 민주주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근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양 정치철학이 추구했던 것은,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귀족, 부자, 평민)에게 돌아갈 합당한 자격과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사실은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본성적인 정치 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주주의 또는 정치(랑시에르에게 이 양자는 동의어다)는 아르케의 질서에서 몫을 배제당한,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추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또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한다면, 민주주의 정체로서 근대 국민국가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라는 토대, 따라서 실제로는 토대 아닌 토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란, 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불변적인 자연적 사실에 기초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윤소영 옮김, 서울: 공감, 2003, 23쪽. 강조는 발리바르)라는 원칙을 가리킨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민들의 호혜적인 행위 이외의 다른 기초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가 기본적으로 주체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연적 토대의 부재 위에, 따라서 존재론적 공백, 검은 구멍 위에 설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나온 세월호 사고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지금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되앂어봐도 티끌만큼도 잘못한 것 없이 제 아이는 제 앞에 없고 저는 이 자리에 있다”면서 “아직도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도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다. 영원히 살고 싶은 나라로, 소생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앞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이번 참사로 딸을 잃은 유가족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호소한 바 있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에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돼요.”

  세월호는 이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하듯 사건은 그것을 어떻게 상속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세월호의 참사가 계속 되풀이되어왔고 또 앞으로 되풀이될 또 다른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될지 아니면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을 위한 출발점이 될지 그것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살아남은 우리에게 제기된 첫 번째 책임은 세월호가 우리 각자에게 질문하는 것, 우리들 각자에게 대답해보도록 호명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욕망하는 나라는 무엇인가, 너희가 원하는 나라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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